아이들에게 성관계와 임신·출산 과정을 사실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과연 ‘나쁜 일’일까.
그동안 한국의 성교육은 청소년들에게 성관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제공하지 않아 오히려 성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심어주고, 성폭력을 예방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제 한국에서도 아이들에게 성관계와 임신·출산 과정을 사실적으로 알기 쉽게 알려주는 책들과, 성소수자 등 사회적 다양성을 반영한 그림책들이 적잖게 출간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선정적이다’ ‘동성애를 미화한다’는 비판이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최근 여성가족부가 성평등 교육을 위해 초등학교와 도서관에 배포하는 ‘나다움어린이책’ 중 일부가 어린이들에게 “동성애를 미화·조장하고 남녀 간 성관계를 노골적으로 묘사했다”는 주장이 나와 논란이 됐다. 이에 대해 해당 도서들이 해외에서는 이미 우수 도서로 인정받아 유아 성교육 자료로 쓰이고 있으며, 도서의 일부 장면만을 편집해 책 내용을 왜곡했다는 반박이 제기됐다.
미래통합당 김병욱 의원은 지난 25일 열린 국회 교육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여성가족부에서 진행 중인 ‘나다움어린이책’ 사업으로 선정된 134종의 도서 가운데 <엄마 인권 선언> <아빠 인권 선언>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 등이 ‘동성애 미화, 성관계 묘사’로 문제가 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논란이 된 것은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라는 책이다. 이 책은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고 성관계를 통해 아이가 생기고 출산에 이르는 과정을 해부학적이면서도 알기 쉽게 설명한 책이다.
김 의원은 이 책이 성관계를 설명하면서 ‘이 과정을 성교라고 해. 신나고 멋진 일이야’라고 쓴 구절 등을 인용하며 “성교를 일종의 놀이처럼 서술하고 있다” “조기 성애화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해외에선 권위 있는 상 수상작…아동교육에 널리 쓰이는 책들
하지만 이 책은 덴마크의 교사이자 심리치료사, 성 연구가인 페르 홀름 크누센이 쓴 책으로, 덴마크에선 1971년 출간돼 유아동 성교육 자료로 쓰이고 있는 책이다. 1972년엔 덴마크 문화부 아동도서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에선 2017년 출간됐으며, 3세 이상이 읽을 수 있는 도서로 분류돼 있다.
또 문제 삼은 책은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 <엄마 인권 선언> <아빠 인권 선언> 등이다. 이 책들은 동성애를 조장·미화한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 이들 책 가운데 “아주 비슷한 사람들이 사랑할 수도 있어. 예를 들면 남자 둘이나 여자 둘” “원하는 대로 사랑할 수 있는 권리. 원할 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권리” 등을 이야기한 부분이 ‘동성애를 조장’한다고 지적했다.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은 스웨덴 작가 페르닐라 스탈펠트의 그림책으로 한 해 최고의 아동문학작품에 주는 작가상인 엘사 베스코브상 등을 수상한 작가다.
<엄마 인권 선언> <아빠 인권 선언>은 국제앰네스티의 지원으로 프랑스에서 출간된 <우리 가족 인권선언> 시리즈로 출간된 책으로 프랑스에선 3만부 이상이 판매되고 학교에 보급됐으며 10개 언어로 번역 출간된 책이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도 추천도서로 선정했다.
올바른 지식을 제공하는 성교육, ‘성관계 시작 시기 지연’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몸의 성장과 변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등 이해를 높이고, 다양한 가족 형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사회적 약자를 존중하는 취지에서 선정된 책”이라고 해명했다. 이명화 아하청소년성문화센터장은 “아이들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음란물을 접해서 생기는 부작용보다 더 교육적”이라며 “학교에서 교사와 사서가 학년을 구분해 배치하고 지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보건교사 A씨는 “교과서에서도 해부학적으로 성기가 묘사돼 있어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했다.
유네스코에서 발간하는 ‘국제 성교육 가이드’는 5~12세 아동을 위한 교육 내용으로 ‘비전통적 가족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가족에 대한 이해와 존중, 다양한 결혼의 방법, 생물학적 성과 젠더의 차이, 성 및 재생산 건강과 관련한 몸의 부분을 묘사하기, 성기가 질 속에 사정하는 성관계의 결과로 임신할 수 있음을 알기, 신체적 접촉을 통해 쾌락을 느끼는 방식 설명하기, 섹슈얼리티에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임을 인식하기,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하는 효과적인 방법’ 등을 제시하고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러한 성교육의 성과로 성행위 시작 시기 지연, 성행위 빈도 감소, 성 파트너 수 감소, 위험한 행동의 감소, 콘돔 사용 증가, 피임 증가 등의 효과가 나타났다. 김 의원은 성관계에 대한 설명이 ‘조기 성애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유네스코 ‘국제 성교육 가이드’는 “세계 각국의 연구는 섹슈얼리티 교육이 성행동 시작 시기를 앞당기는 일은 거의 없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연구들은 성교육이 성관계 시작 시기와는 직결되는 영향이 없으며, 오히려 시작 시기를 늦추거나 성적 행동에 더 책임 있는 태도를 갖게 한다고 말한다”고 밝히고 있다.
나다움어린이책 선정위원회 관계자는 “성에 대한 선입견이 낮은 어린 나이에 열린 분위기에서 구체적으로 성교육을 시작하는 것이 호기심이나 충동적으로 성적 행동을 하는 것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온라인 매체의 발달로 어린이들이 검증되지 않은 성에 대한 영상물을 접하는 연령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며 “어린이들이 성에 대한 부정확하고 부정적인 내용을 접하기 전에 먼저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통해 성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태도를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여가부와 롯데,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협약으로 이뤄지는 나다움어린이책 사업은 어린이 성평등교육문화사업으로 지난해 총 134종의 도서를 5개 초등학교에 지원했으며, 올해는 초등학교 10곳이 선정됐다. 성교육, 자기 긍정, 다양성, 인권 등을 다룬 책들을 포함하고 있다.
n번방, 다크웹은 성교육의 실패…올바른 성교육 이뤄져야
한국의 경우 최근 미성년자 성착취 영상을 제작하고 유포한 ‘n번방 사건’과 ‘다크웹’ 사건 등이 불거지면서 어린 시절부터 ‘올바른 성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현직 초등학교 교사 B씨는 “n번방과 다크웹 등 디지털 성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생산물을 소비한 수많은 가해자들은 모두 한국에서 배우고 자란 남성들이었다”며 “우리나라 성교육의 허점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B씨는 이어 “성범죄 가해자는 어떤 처벌을 받게 되고, 학생이 성범죄 피해자가 되면 교사는 어떤 대응을 해야 하며, 양육자는 평소 아이에게 어떤 성교육을 시켜야 하는지 공교육에서 적극적으로 가르쳤다면 이렇게 다수의 가해자가 양성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B씨는 이어 “아이들은 스마트폰에서 손쉽게 포르노를 감상하고 성적대상화와 여성혐오가 가득한 미디어를 시청하며 자기들끼리 실천해본다”며 “포르노로 성을 배우기 전에 유아 때부터 성에 대해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 왜곡된 성을 접하기 전에 과학에 기반한 설명과 적절한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 올바른 성교육의 시작이다. 전통이라는 명목 아래 성교육을 기존 그대로 방치한다면 ‘제2의 손정우와 조주빈’이 더 빠른 주기로 등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성평등 그림책 구독 서비스를 제공하는 우따따의 유지은 대표는 “온라인에서 접할 수 있는 성지식은 왜곡되고 잘못된 것들이 많다. 아이들이 궁금한 것을 인터넷에서 찾지 않길 바란다면 성지식을 올바르게 알려주는 게 중요하다”며 “실질적 지식을 제공하는 성교육이 잘 이뤄지고 있는 네덜란드의 경우 십대 청소년의 성관계 시작 나이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유 대표는 성소수자가 등장하는 그림책에 대해선 “성소수자 청소년들이 본인의 성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거나 어떻게 커밍아웃하고 드러내야 하는지 알지 못해 자살하는 확률이 높다고 한다. 10대 청소년 성평등 교육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성소수자에 대한 교육”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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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경 기자 samemind@khan.kr
August 27, 2020 at 11:26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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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경의 Stage]'성지식'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전달되어야 할까[플랫]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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