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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열린책들 편집이사 머리 깎을 때 미용사가 가르마의 방향을 물어본다. 이쪽이라고 알려주면 고개를 갸웃하거나 반대 방향이 더 보기 좋을 거라고 권할 때가 있다. 굳이 논쟁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 해달라고 하지만, 집으로 가는 길에 손으로 쓱쓱 빗어서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지만 그의 판단이 옳을 거라는 생각은 한다. 그가 전문가이기도 하고, 내가 내 얼굴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이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자기애의 화신이기는 해도 남 얼굴을 내 얼굴로 착각할 정도는 아니니까. 그러나 조금 복잡한 차원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컨대 배우는 영화 속 자신의 연기를 보기가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오히려 스크린에서 관객석에 앉은 본인을 쳐다본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에 이르면, 나와 타인의 생각의 괴리는 목숨이 걸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1939년 프라하. 게슈타포에 체포된 작가가 총살형을 기다린다. 처음에는 죽음 자체가 두려웠는데, 그 못지않게 두려운 일이 있다.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들이 흡족하지 않은 것이다. 후세는 이 평범한 작품들로 그를 판단할 게 아닌가? 대표작이 될 거라고 기대하는 게 있지만 원통하게도 미완성이다. 사격 명령. 갑자기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한 느낌에 정신을 차려보니 세계가 정지해 있다. 독일군의 동작이 멈춰 있고 빗방울도 공중에 떠 있다. 몸은 꼼짝할 수 없는데 정신은 또렷하다. 꼬박 1년 동안 그는 머릿속에서 수정을 거듭하며 작품을 완성한다. 드디어 완성했다. 그 순간 빗방울이 다시 떨어지고 총소리가 들린다. 그는 사살된다. 뇌 속의 대표작과 함께. 그가 매달린 ‘작품’이 그의 생애를 뜻한다는 걸 알아차리긴 쉽다. 그는 죽기 전 자기 생애를 나름대로 수정 보충하려 했던 것이다. 보르헤스 소설 <비밀스러운 기적>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 모두가 저마다 아무도 모르는 차원을 감추고 있다면 어떻게 선과 악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나? 한 사람의 정상을 참작하는 데에도 영원의 세월이 필요하지 않을까? 보르헤스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의외로 곳곳에 촌철살인적 문장들을 뿌려놓았다. “그는 다른 작가들을 그들이 보인 업적으로 평가했지만, 그들이 그를 평가할 때는 장차 달성할 업적을 가지고 평가해주길 바랐다.” 나는 네 겉만 보겠으나 너는 내 속을 봐줘야 한다는 이런 태도. 내면은 오직 나만의 것이라는 태도. 주변에 이런 유아적인 태도를 노출한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대체로 냉혹하게 반응한다. 가끔 그의 딱한 정신 상태를 동정하기도 하고, ‘나도 다르지 않다’고 반성의 계기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냉혹, 연민, 반성 어느 쪽으로 기울든, 이런 유아적 태도를 허용하거나 격려할 마음을 품지는 않는다. 이게 사회의 원리가 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감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공감의 가치는 선량함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애와 주관성에서 벗어날 계기를 준다는 데 있다. 그런 목적이라면, 드러나지 않는 내면에 대한 공감은 권장될 수 없다. 내가 알 법한 내면의 당사자는 몇명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이런 선택적인 공감은 취지에 맞지 않는다. 보이는 것, 즉 타인이 볼 수 있는 것이 우선이다. 타인이 볼 수 없는 것은 차례를 기다려야 맞다. 후자에 우선권을 주면 전자는 상대화, 주변화, 비가시화된다. 그런 일들을 본다. 타자를 초대할 마음이 없는 공감이란 대체 무엇일까. 친구들끼리의 잔치에 불과하지 않을까. 공감이란 말도 이제 시효를 다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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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31, 2020 at 03:14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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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 / 김영준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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